제11회 체험기 기획전「우라카미의 기억」

원폭을 목격한 17살의 여름

【집필자】
오자키 도메이(小崎 登明) 
(당시 17세)

어머니의 기일인 원폭의 날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 어머니가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는 것입니다. 특히나 어릴 때라면 부모와의 이별은 힘든 법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50년, 이미 오래전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함께한 추억도 돌아가신 날의 일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생명과 더불어, 한 발의 원자폭탄이 약 7만 3천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이는 어머니의 기일이자 돌아가신 시각입니다.
 원폭이 떨어진 당시 저희 집은 가장 피해가 심각했던, 폭심지에서 5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8월 9일 당일은 물론이고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이것이 그 무시무시한 원폭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방사능의 한복판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와의 이별, 출근하던 날의 아침

 그날 아침 저는 “엄마, 다녀올게요.” 하고 말한 뒤 집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 더 “엄마, 저 가요.” 하고 말하자 부엌에서 아침을 먹고 난 그릇을 씻고 있던 어머니는 제 쪽을 돌아보며 활짝 미소 지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집도 어머니도 불에 타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화재였으면 타다 남은 기둥과 가재도구 등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원폭의 폭풍으로 날려가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유골조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저는 ‘엄마’라고 부를 수가 없어졌습니다.

터널공장에 가 있었다

 어떻게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하면, 그날은 무기제작소의 스미요시(住吉)터널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일본 각지는 미국 폭격기의 공격과 공습을 받아 차례로 불태워졌습니다. 전쟁이 격화되자 나가사키에도 B29 편대가 나타나 상공을 날아다녔습니다.
 공장이 적기의 공습을 받아 기계가 파괴되면 생산이 불가능해지기에 산에 터널을 파서 그곳으로 기계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보다도 기계가 중요했습니다.
 터널공장은 주간과 야간 근무, 2교대제였고 저는 원폭이 떨어진 날은 주간 근무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야간 근무였다면 폭사했을 겁니다.

피폭하던 순간! 터널 안으로 불어닥친 폭풍

 저는 네 척 짜리 선반(旋盤) 기계를 사용해 항공기 어뢰 부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11시 2분이 되었습니다.
돌연 귀청을 찢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입구에서부터 폭풍이 세차게 불어닥쳐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떠서 몸을 일으키자 터널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원들이 떠들썩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킨 것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제 곁으로 다가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무슨 일이니?” 하고 석유램프를 소녀의 얼굴 가까이에 갖다 대자 머리카락이 지글지글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다 돼서 공장에 도시락을 가지러 터널을 나왔어요. 그랬더니 ‘번쩍!’ 하고. 정신을 차리자 이렇게 돼 있었어요.” 하고 하염없이 흐느꼈습니다.
 어찌 됐든 근처에 큰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뒤 터널 안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부상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터널 안은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타들어가는 집, 누구도 불을 끄지 않았다

 터널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본 것은 불에 타고 있는 이층집이었습니다.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불을 끄지 않는 것일까요?
 이전까지는 훈련을 받아서 아무리 작은 화재라도 불을 끄도록 했는데 집이 활활 타고 있는 지금은 누구도 진화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소년이었던 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불을 끌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활활 타들어가는 집을 바라보던 우리는 불길 때문에 도로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높지막한 언덕을 올랐습니다.
 그러자 연기로 뒤덮인 우라카미(浦上) 일대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상황이 심각해. 큰일이 벌어졌어.”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한이 들었습니다.

여학생을 들것으로 실어나르다

 즉시 본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공장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인적은 없었습니다.
 피폭 직후의 우라카미를 걸으며 가장 이상했던 점은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서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체만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이봐, 여기로 좀 와 줘.” 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자 두세 명의 성인 남성들이 여학생을 구조하고 있었습니다. 공장의 커다란 재목 아래에 깔려서 다리가 끼여 있었습니다.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괜찮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하고 남자들이 위로하고 힘을 북돋으며 어떻게든 소녀를 끌어내서 들것에 실었고 저도 함께 옮겼습니다.
 “어디로 옮기면 되죠?” “철도 선로로.”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었지만 선로까지 데려가면 기차가 와서 오무라(大村)나 사세보(佐世保)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다 줄 것이었습니다.

미쓰비시나가사키무기제작소 스미요시터널공장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됐을까

 선로를 넘어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뭐야, 사람들이 여기에 다 와 있었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부상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사람, 내장이 튀어나와 축 늘어져 있는 사람, 큰 소리로 부르짖는 사람, 화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그 끔찍한 상황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더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방공호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고독감과 고요함, 서늘한 공기,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자 점차 가라앉는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해.’
 방공호를 나와 폭음이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숲을 내려왔습니다.
 오후 3시 무렵이었습니다.
 가스탱크가 빈 깡통처럼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신과 말의 사체가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찌 됐든 쓰러져 있는 사람이 많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걷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습니다. 살아있는, 상태가 멀쩡한 사람과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에서 초등학생 남자아이와 조우하다

 저는 게다(下駄)를 소리 내어 끌며 우라카미강에 놓인 모토오하시(本大橋)에 가까워졌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저희 집이 있었습니다.
 다리는 부러져서 강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너기 위해 돌계단을 내려와 강바닥을 걸었습니다. 그곳에 많은 부상자들이 있었습니다. 원폭의 열로 몸이 달아올라 목이 마른 것입니다. “물, 물.” 하고 물을 찾아 강으로 들어가 물을 마신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몇 구나 되는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빠르게 물살을 통과하려고 게다를 벗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발요. 살려 주세요.” 하고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제게 호소해 왔습니다. “다리를 다쳐서 걸을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파서 못 걷겠어요. 부탁이에요. 저를 살려 주세요.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병원도 의사도 없었습니다. 도와주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라카미도 이나사(稲佐)도, 나가사키는 전멸한 것입니다. 타인을 돕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원폭의 무서움입니다.

모토오하시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여자아이와 어머니의 머리카락

 우라카미강을 건너서 도로로 올라갔습니다. 쓰러진 집을 타고 넘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숨이 끊어져 방치된 어린아이의 시신이 꼭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집 옆에 초등학교 1, 2학년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살려 주세요.” 하고 제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집 아래에 깔렸어요.” 몸을 숙이고 살펴보니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서 무너진 집의 거대한 목재를 어떻게 치울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대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타인을 도울 수 없다는 슬픔, 원폭의 날에 몸소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윽고 불길이 솟구쳐올라 집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도 아이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집도 어머니도 불에 타버리다

 시야가 탁 트인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한 채의 집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저는 폭심지에서 2, 3km 지점인 터널공장에서 폭심지에서 500m 떨어진 지점까지 근접한 것입니다. 집은 불에 타서 무너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집을 넋을 잃고 바라봤습니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 걸까. 무엇을 하고 계실까. 눈물이 나오지도 울 수도 없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불길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건 걷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오하시에서 선로를 따라 스미요시터널공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터널 안은 혼잡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산에서 그날 밤을 맞이했습니다.
 이나사산으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아, 오늘 하루는 대체 뭐였을까. 17살의 소년이 생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나가사키 전체가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여 하늘이 몹시도 기이했습니다.
 저는 피곤했는지 옅은 잠에 빠졌습니다. 꿈인지 환상인지, 어머니를 보고 무의식중에 소리 내어 외쳤습니다. “엄마, 어디에 있는 거야?”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은 채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야마자토마치의 고지대에서 바라본 우라카미천주당 방면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원폭이란 어떤 폭탄인가

 당시 17살의 소년이었던 저는 이것이 원자폭탄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폭탄의 위력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원폭은 폭풍과 열선, 무시무시한 방사능을 초래합니다.

원폭으로 발생하는 폭풍

 그 위력을 알 수 있는 일례로, 택시가 도로에서 밭까지 20여 미터를 날려가 뒤집혀 있었고 운전사는 통째로 불에 타서 벌거벗은 채 밭에 웅크리고 있는 광경을 피폭 1시간 뒤에 목격했습니다.
 밭에는 자전거 채로 날려와 흙투성이가 된 남자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원폭으로 인한 열선

 머리카락과 피부도 불에 타서 벗겨진 피부가 흘러내렸습니다. 셔츠도 너덜너덜했습니다.
 저는 공장을 오갈 때 한 호화로운 저택 앞을 항상 지났습니다. 그 저택은 불에 탔고 집 주인도 전신에 화상을 입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힘없이 현관 앞 돌계단에 앉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 5일 정도가 지난 뒤 다시 그곳을 지났을 때 주인은 그 모습 그대로 숨이 끊어져 있었고 여름이었기 때문에 부패해 있었습니다.
 흙투성이에 새카맣게 탄 시신 두 구를 자전거로 실어 나르는 것을 봤습니다.
 또 새카맣게 타서 선 채로 죽은 사람도 보았습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원폭의 에너지가 너무도 강렬했던 탓에 서 있는 인간이 숯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쪽 눈알이 튀어나오고 혓바닥을 있는 대로 늘어트리고는 새카맣게 타서 선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원폭을 저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근에 히로시마(広島)의 원폭으로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새카맣게 타서 선 채로 죽어 있는 사진을 봤습니다. 더군다나 한쪽 다리로만 서 있었습니다. 그때 아아, 내가 원폭의 날에 목격했던 것은 실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폭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가족도 집도 사람의 마음까지도 파괴해 버립니다. 무시무시한 폭탄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우라카미천주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 거대한 붉은 벽돌의 천주당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식량 창고로도 쓰였기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화재가 계속됐습니다.

원폭의 무서움은 방사능

 당시에는 70년간 초목이 자라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인간과 동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에 좀먹혔습니다.
 저는 옆집에 살고 있던 친척네를 구조했지만 11명 중 10명이 원폭으로 죽고 한 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죽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방사능이 침범한 것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에 반점이 생겼고 설사, 발열, 식욕 부진, 무력감 등의 증상으로 어린아이부터 차례로 죽어나갔습니다.
 이것이 방사능의 무서움입니다.
 옆집 초등학생의 증언으로 저희 어머니가 그 집의 툇마루에 계시다가 집으로 돌아온 뒤 폭탄과 맞닥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도 “전쟁이 싫어. 괴로워. 목이 말라.”라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저는 홀로 친척들 10명의 시신을 원폭의 언덕에서 태웠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유골을 매장했습니다.
 신코젠(新興善)국민학교의 치료소에서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자살한 남자를 봤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자

 전후에 동유럽의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5번 정도 방문했습니다.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산처럼 쌓인 ‘머리카락’을 봤을 때, 원폭의 날에 봤던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전쟁은 이제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토록 핵폭탄이 끔찍했음에도 아직 인류는 핵 폐기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원폭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평화의 근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함께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가사키 평화추진협회/편찬
『피스 토크 Ⅷ』에서 발췌

여름 하늘 아래서

【집필자】
나카무라 가즈토시(中村 一俊)
(당시 11세)

원폭이 투하되기까지

 그날도 나가사키의 하늘은 푸르렀고 한여름의 태양은 오늘 하루 동안의 더위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동쪽 산에서부터 떠올랐습니다. 아침부터 발령된 공습경보도 해제되어서 남동생들과 매미를 잡으러 나갈 채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야마자토마치(山里町)의 북부 273번지, 지금의 헤이와마치(平和町) 평화회관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집 바로 동쪽에는 의대 운동장과 대학의 여러 시설이 있었는데 철망이 둘러진 구내는 어린아이의 눈에는 광대해 보였습니다. 울창한 녹나무 거목에는 빽빽할 정도로 매미가 앉아 있었고 몸을 진동하며 종일 시끄럽게 울어댔습니다. 출입문에는 수위가 무섭게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었지만 멀찍이 떨어진 철망의 찢어진 틈으로 몰래 들락거리며 부지런히 매미를 잡았습니다. 드디어 준비를 끝마쳤을 때 어머니가 제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아쉬웠지만 어머니의 말씀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전황은 극도로 악화된 듯했는데 어린아이라도 그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습니다. 피난 장소는 좁은 마당 한쪽 끝에 파놓은 간이 방공호였고 한밤중에도 잠에서 깨서 좁은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 온 가족이 어깨를 맞대고 숨을 죽였습니다. 달빛에 반사되어 은색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B29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 마음에도 불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예감에 몸이 떨렸습니다. 식량 사정은 특히나 심각했는데 사람 수만큼의 쌀과 콩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을 쌀에 섞어 밥을 짓도록 함께 배급되었습니다. 건조된 깻묵은 향긋하지만 열을 가하면 나는 독특한 냄새 때문에 도무지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서 깻묵 덩어리를 몰래 버려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인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어머니께서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겁니다. 온화하셨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길을 걸을 때도 묵주를 세면서 걷는 분이셨습니다. 몸도 작고 허약해서 때로는 쉬고 싶을 때도 있으셨을 테지만 한창 먹을 나이인 자식들이 많아 그러지도 못하셨고 어디가 됐든 걸어서 식량을 구해 오셨습니다.

묵주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그날도 전날 배급으로 받은 쌀을, 만일을 위해 시골에 있는 지인에게 맡겨 둔 오래된 쌀과 바꾸러 가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게으른 저였지만 어머니를 위한 일이라면 자진해서 의욕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묵직한 쌀을 등에 짊어지고 어머니를 따라나섰습니다. 큰길을 향해 좁은 골목길을 30미터 정도 걸어갔을 때 무심코 뒤를 돌아봤습니다. 언제 따라온 건지 남동생 둘과 누나네 아이들 둘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랐기 때문에 저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마주 보았지만 그것이 그 아이들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 순간에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걸어가는 길가에는 표어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습니다. 미영격멸(米英撃滅), 사치는 적이다, 이길 때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가솔린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등등, 이보다 더 많은 표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쓰지마치(辻町)가 된 모토하라마치(本原町)였습니다. 그곳은 ‘십자가 산’이라고 불리던 높직한 언덕의 중턱으로 위쪽까지 계단식 밭이 이어졌습니다. 낡은 농가에는 안쪽 방에 누워 있는 어린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젊은 부인과 남자아이 한 명, 할머니처럼 보이는 사람까지 네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른들끼리는 잘 아는 사이였으니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저도 제 또래인 소년과 금방 친해져서 여러 놀이를 하며 정신없이 놀았습니다.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랐고 어머니는 집에 다른 아이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저를 불러 돌아갈 채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모처럼 친구가 된 아이가 간절하게 조르기도 해서 저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조금 더 놀다 가기로 했습니다. “그럼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야 된다.”라고 하셨던 것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바꾼 쌀과 아이들을 위해 고구마를 조금 얻어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암전

 점심때가 가까울 무렵, 저희 둘은 시모노강(下の川)에서 물을 길어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집 안에 우물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한여름이기도 해서 사용수 정도는 계곡물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함석으로 된 양동이 하나를 받아들고 계곡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지금과 달리 계곡물은 맑고 깨끗했습니다. 한 동이의 물을 길어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가파른 경사와 양동이의 무게, 하물며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둘 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올랐습니다. 겨우 집에 도착해 현관으로 들어서는 턱에 나란히 걸터앉은 순간,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빛과 동시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의식도 새하얗게 멀어져 갔습니다.

폭심지에서 바라본 북쪽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요. 저는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지금 집 아래에 깔려서 지면에 배를 깔고 엎드린 상태라는 것, 몸을 움직였을 때 딱히 통증이 느껴지지 않으니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만은 간신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입과 코로 호흡할 때마다 숨을 죄어오는 잔해 더미에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봐, 와키하마(脇浜)!” 하고 막 알게 된 소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야!” 하는 응답이 안쪽에서 들려왔습니다. 저와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훨씬 안쪽까지 날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다행히 소년의 근처에 희미하게 구멍이 보인다는 것과 그 구멍을 통해 먼저 탈출한 뒤 제가 빠져나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제 몸 바로 위로는 지렛대로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두꺼운 대들보가 쓰러져 있어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소년의 목소리에 의지해 땅바닥을 기어서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을음으로 가득한 곳을 기어서 그가 빠져나간 구멍에 다다랐습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마주한 세계는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한여름의 태양은 간데없이 해 질 녘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빛도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이미 무너진 집의 지붕 위로 나와 있었고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볏짚을 잡아 뜯고 있었습니다. 어둑하게 어두운 상황이었지만 방에서 자고 있던 아기를 구해내려고 한다는 걸 알아채고 함께 힘을 보태려고 구멍에서 나온 순간, 바지직하고 바로 옆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점심 준비를 하려고 피워놓은 불이 초가지붕에 옮겨붙은 것입니다. 우리는 불길에 쫓겨 어둠 속을 뛰어다녔고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타들어 가는 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통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뒤편의 계단식 밭으로 도망쳤고 불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 멍하니 불꽃을 바라봤습니다. 시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거대한 불덩어리가 보였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이 눈앞 가득 펼쳐진 불바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어느 부근까지 가셨을까. “어머니!” 하고 소리 내어 외쳤습니다. 머지않아 아래쪽에서부터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피부에 화상을 입은 반라 상태의 사람들이 올라왔습니다. 개중에는 힘이 다해 밭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 하나 아는 이도 없는 곳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서둘러 남쪽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걱정해 역이 있는 방면에서부터 산을 타고 이곳으로 오고 계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쪽을 향해 걸어가면 분명 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다친 사람들이 올라오는 쪽과 다른 길로 뛰어 내려가 우라카미(浦上)제1병원(현재의 성프란체스코병원)의 왼쪽 뒤편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을 목표로 깊은 강 속을 걷고 밭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걸어나갔습니다. 멀리서부터 폭풍으로 날려온 사람들 중에는 조금씩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고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에 한 명, 또 저기에 두 명, 하는 식으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재빨리 물러서거나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우라카미천주당 근처까지 와서 몇 십 명이나 되는 죽은 사람들이 강에 떠 있는 모습을 본 뒤로는 충격과 공포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방대한 수의 시신에 신경이 마비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잔해 더미가 된 우라카미천주당 뒤편에서 강으로 내려가 얕은 물을 건너 아나코보산(穴弘法山)의 묘지에 가까스로 다다른 저는 항구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온 시내가 완전히 불에 타서 참담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묘비도 쓰러져 있거나 해서 똑바로 서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금세 산언저리에 사람들의 행렬이 생겨났습니다. 역으로 향하는 사람,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돼 우라카미 방면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 행렬에 합류하려고 발걸음을 떼자 나지막하게 “형.”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런 곳에서 사람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근처에 폭풍으로 날려온 화려한 무늬의 이불이 놓여 있었고 그 끝에 남자아이의 얼굴이 나와 있었습니다. 머리카락도 얼굴도 불에 타 있었지만 검은 눈동자가 맑은 소년이었습니다. 때마침 다가온 저에게 남은 힘을 쥐어짜 말을 건넨 듯 보였습니다. “형, 물 좀 줘.” 하고 화상을 입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찌그러진 도시락통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당황한 제가 “여기는 산이라서 물이 없어.” 하고 말했더니 “저기에 있잖아.” 하고 아래쪽을 가리켰습니다. 과연 제가 지나온 우라카미천주당 아래로 강물이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곳까지는 거리가 멀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소년에게 설명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물을 구해다 줄 테니까 기운을 잃지 마.” 하고 말하자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야마자토의 언덕에서 바라본 폭심지에서 제1병원까지의 전경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저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들었습니다. 무너진 가옥의 지붕을 뛰어넘고 밭을 가로지르기도 하면서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메자메마치(目覚町)의 위쪽까지 왔을 때 교차해서 지나가는 행렬 뒤로 아버지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밀치고 달려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와 다시 만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버지도 저를 끌어안고 “아아, 가즈토시 살아있었구나.” 하며 기뻐하시고는 “엄마는?” 하고 물어 왔습니다.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모토하라로 간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으셨겠지요. 저는 사정을 설명하고 어머니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보다 안쪽에 있는 곳이라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수색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아까 지나온 묘지까지 되돌아갔을 때 아버지께 사정을 말하고 서둘러 소년이 있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불이 곧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년이 있는 곳까지 몇 발자국밖에 남지 않았을 때 검은 연기 같은 파리떼가 날아올랐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머리맡으로 다가갔습니다. 팔을 여전히 내밀고 있는 소년의 두 눈은 두 번 다시 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핵무기

 불길이 가라앉은 뒤 아버지와 화재터로 들어가 있는 며칠 동안은 땀과 흙투성이가 되어 보냈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득시글거리는 파리떼에 뒤덮여 있는 남동생들을 한시라도 빨리 화장해 줘야 했습니다. 동생들은 놀고 있던 모습 그대로 한곳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파리떼에 둘러싸여 타다 남은 목재를 주워모았습니다.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4명을 화장하려면 상당한 양의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주워모은 목재를 사각형으로 짜 맞추고 그 위로 반쯤 불에 타서 미끄러운 동생들의 팔다리를 들어 아버지와 옮기고 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삼일 전까지 함께 뛰어놀았던 것은 모두 꿈이었던 걸까요. 뼈만 남을 때까지를 기다려 타다 남은 양동이에 뼈를 담고 또다시 어머니를 찾아 나섰습니다. 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는 시신이 있었습니다. 악취와 파리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어머니는 결코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고, 죽을힘을 다해 샅샅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끝내 어머니를 찾지 못했습니다. “가즈토시 이제 그만하자꾸나. 엄마는 상당히 먼 곳까지 날려갔거나 그대로 천국으로 갔을지도 몰라.” 하고 아버지는 혼잣말하듯 말씀하셨고 그렇게 수색을 중단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고 저도 벌써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습니다. 저는 가끔 혼자서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들을 참배하러 평화공원으로 갑니다. 8월 9일에는 가족 모두가 참배를 드리러 갑니다. 저희 어머니의 유골을 누군가 발견해서 그곳에 함께 모셔 두었을 거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지금이라도 편히 쉬세요.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저도 그곳으로 갈 테니까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지금 세계에는 약 1만 6천 발의 핵무기가 남아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 핵무기들을 없애야만 합니다. 같은 숫자라도 어머니와 동생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핵보다 수십, 수백 배나 되는 위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운반 방법도 하늘, 바다, 또 몇 천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대륙 사이를 통해서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보유국은 핵무기의 폐기에 완강히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끈질기게 세계적으로 여론을 일으키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낸다면, 제아무리 보유국이라 할지라도 끝내는 핵무기의 폐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동생들과 어머니도 부디 제게 힘을 보태 주세요. 저는 수학여행으로 나가사키를 찾은 학생들에게도 힘주어 말합니다.
“여러분! 핵을 모두 없애는 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부디 핵을 폐기해야 한다고 수시로 목소리를 내는 어른으로 자라 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나가사키 평화추진협회/편찬
『피스 토크 Ⅹ』에서 발췌

한여름의 악몽
-나무 십자가-

【집필자】
히라야마 가네노리(平山 兼則)
(당시 18세)
폭심지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다케노쿠보마치에서 피폭

폭심지에서 400m 부근

 폭심지에서 고작 4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모토오마치(本尾町) 2-3(우라카미교회 아래)에 집이 있었습니다. 집 뒤편에는 가와구치(川口) 교리 교사님 댁이, 또 근처에는 야하타마치(八幡町) 교회의 후카호리 마사미(深堀 正美) 주임 신부님의 본가로 수제 연과 담배, 우표, 건조식품 등을 판매하는 제등 가게가 있었습니다. 또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 다가와(田川)상점(지금도 있습니다)에 고구마를 튀겨서 만든 카린토나 잠두콩, 말린 다시마와 용돈으로 1엔을 받아들고서 교회 학교로 가는 것이 어린 시절(전쟁 전)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시모사키(下崎)상점에는 십자가와 묵주, 촛대, 성화 등을 판매했고 그 건너편에는 우라시마(浦島) 나무통 가게가 있었는데 장례식 전날 분주히 관을 만들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동네 주변은 군데군데가 논밭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분위기였습니다. 연날리기에 열을 올리다 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우라카미교회의 이색적인 브라스 밴드가 유명해서 잔칫날에는 물론이고 장례식 때도 베토벤의 장송 행진곡이 장엄한 미사 중에 연주되었습니다. 또 나가사키대학의 운동장에서는 교회 장년부의 주최로 야구 지구 대항전이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로마 교황이 말한 ‘전쟁이라는 이름을 한 악마’가 문을 두드렸고 8월 9일에 그 끔찍한 원폭이 투하됐던 것입니다.

8월 1일 전후

 6월과 7월에 들어서서 끊임없이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에 경보가 울리면 ‘또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 벽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도 일시적인 위안일 뿐 목조로 지어진 집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목숨을 건지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멀리 떨어진 방공호로 가는 것 또한 귀찮아서 어머니와 함께 여전히 벽장 안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 무렵에는 공습경보가 발령되면 얼마 뒤에 ‘B29’라고 불리는 미국의 폭격기가 두랄루민으로 된 날개와 동체를 은빛으로 번쩍이며 나가사키의 상공을 지나쳐 갔습니다. 이와야산(岩屋山) 방면에서 가와타나(川棚) 쪽을 향해 오무라완(大村湾) 상공을 비행했고 잠시 뒤에는 콰광 하고 폭격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섬뜩한 소리를 들으며
 “우라카미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으니까 폭탄은 떨어트리지 않을 거야.”라던가
 “무슨 소리, 우라카미교회는 좋은 목표잖아. 분명 공격당할 거야.”
 하는 등의 그럴싸한 이야기를 속닥거렸고 모두들 공습에 몸을 떨며 전전긍긍하는 상태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가사키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에 대해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8월 1일의 공습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뱃속을 쿵쿵 울리는 폭탄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고 당장에라도 공격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없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습니다. 지금까지 행해진 공습 중에서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고 간절하게 소리 내어 외치며 마리아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바탕 폭격이 계속되고 난 뒤 마지막에는 저공비행하는 폭음과 기관총을 발사하는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휙 하고 탄환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상당히 가까운 곳을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에 벽장 안에서 더더욱 숨을 죽였습니다. 그날은 대학병원의 굴뚝 부근에 2발, 우연히도 바로 이전에 살았던 슈쿠노사카(宿の坂, 현재의 히라노마치), 그리고 이와카와마치(岩川町) 부근에도 각각 폭탄이 투하됐다고 들었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8월 9일의 악몽

 8월 9일 오전 7시경, 평소에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뒤 출근했는데 그날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와 7시 반 전에 근무지인 미쓰비시(三菱)조선소 이나사제재소(지금의 이나사산 로프웨이 발착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끊임없이 공습경보가 발령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매일 방공호를 파는 작업을 했습니다. 곧장 후치(渕)신사 아래의 현장에서 작업을 개시했습니다(폭심지에서 남서쪽으로 1.5km 지점). 머지않아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고 이나사산 중턱에 있는 방공호로 피난했습니다. 방공호 안은 노인과 아이들, 부녀자로 가득해서 입구 부근에서 대기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적기가 공습해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공습경보가 해제되어 경계경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산을 내려와 노천굴식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매미가 울어대는 속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작업을 이어나가자 비행기의 폭음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함께 작업을 하던 한 중년이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폭음은 차츰 커져갔고 적기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미 방공호도 키보다 높이 파들어간 데다 주위로 큰 나무가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방금 전 밖으로 나갔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적기일지도 모르겠어. 하얀 낙하산 같은 것이 떨어지는군. 신형 폭탄일 수도…” 하는 것과 동시에 대량의 마그네슘에 한꺼번에 불을 붙인 것 같은 섬광이 일대를 감쌌고 그 뒤 흙과 먼지로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습니다. 쏴 하고 흙과 모래 알갱이가 몸을 덮쳐왔고 산 채로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안경이 날아갔고 몸도 굴속으로 내동댕이쳐져서 온몸이 모래와 흙먼지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입안이 꺼끌꺼끌했고 기관지 속까지 모래 알갱이가 들어온 듯 숨이 막혀와서 ‘아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한 뒤 눈을 감았습니다.
 얼마간을 그러고 있으니 눈앞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자 그토록 무성했던 나무와 묵직하게 놓여있던 무덤의 묘석이 모조리 옆으로 쓰러져 있는 무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굴에서 기어 나와 방공호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에는 오로지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으로 행동했습니다. 도중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걸 감지한 정도였고 그 외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내 안경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래 있던 노천굴로 내려가려고 하자 우라카미강 건너편은 모든 것이 불바다가 되어 검은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강의 앞쪽에 위치한 다케노쿠보(竹の久保)는 가옥이 전부 무너져 있었습니다. 근처에서 “살려 줘!” 하는 비통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찌 됐든 안경이 없으면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굴속을 손으로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찾은 보람이 있었는지 무사히 안경을 발견했습니다. 다행히 부서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강가로 내려오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와 얼굴, 상반신이 불에 탄 사람, 얼굴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사람, 다리를 다쳐서 피를 흘리며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 등, 눈앞에서 지옥에서 튀어나온 듯한 형상의 사람들이 줄줄이 우라카미강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살려 줘.” 하는 소리가 귓전에 아른거려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기왓장을 들어내고 붕괴된 가옥의 목재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전문가가 아닌지라 좀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습니다.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네댓 명을 간신히 구출해 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 가까워져 있었고 저희 집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제재 공장까지 불길이 번져서 무더기로 쌓아놓은 목재가 맹렬한 기세로 불타올랐습니다. 저는 즉시 귀로에 올랐습니다.
 집이란 집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활활 불타올랐고 새빨간 화염이 하늘 위로 치솟았습니다. 도로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라카미강만이 유일한 이정표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강 속으로 들어가 상류를 향해 나아가다가 도중에 강을 가로질러 시모노강(下の川)으로 진입한 후 뭍으로 기어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무표정으로 미치노오(道の尾) 방면을 향해 철도 선로 위를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쓰야마마치(松山町)의 전차 정류장에서 선로를 벗어나 우라카미교회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방은 불바다였습니다. 도무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주저하고 있으니 경방단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리로 가면 살아남지 못할게요!”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저는 포기하고 다시금 철도를 지나 오하시(大橋)의 철교를 건넜습니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어서 땅거미가 발밑을 감쌌습니다. 아직 가옥을 태우는 불꽃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철교를 건널 때 옆에서 걷고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진제이(鎮西)학원중학교의 가타오카(片岡) 선생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철근으로 된 교사(校舍)가 막아준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주위가 어두우니 이 이상 나아가는 것은 위험해. 여기서 노숙을 해야겠다.” 하고 선생이 말했고 니시마치(西町) 부근에 있는 밭의 절벽 아래에 걸터앉았습니다. 선생은 “점심도 못 먹었네. 밥을 짓자꾸나.”라고 하며 배낭에서 반합을 꺼내 근처에 있던 우물물로 쌀을 씻었습니다. 쌀을 씻은 뒤에는 불에 타고 있는 재목 곁으로 반합을 가지고 가서 밥을 지었습니다. 저도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하지만 입안이 모래알과 먼지로 꺼끌거렸습니다. 밥을 입에 넣자 으적거리며 모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말 그대로 모래를 함께 씹어 삼키는 격이었고 도무지 내키지 않는 식사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몸을 누였지만 하루 종일 충격의 연속이었던 탓에 정신이 또렷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낮 동안의 피로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폭음이 들려와 벌떡 몸을 일으켰습니다. 조명탄처럼 보이는 섬광이 미쓰비시무기제작소(지금의 나가사키대학)의 상공에서 반짝하고 빛났습니다. ‘또 신형 폭탄인가!’ 하고 무의식적으로 엎드렸습니다. 두세 번, 대낮처럼 환한 빛이 주위를 비췄습니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날이 훤히 밝아와 주변을 판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직 가옥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니 전방의 불탄 집 내부에 새카맣게 타서 뼈만 남은 시신이 몇 구나 쓰러져 있었습니다. 옆을 보자 어제 선생이 쌀을 씻었던 우물에도 시신이 떠 있었습니다.

미쓰비시나가사키조선소 이나사제재공장의 저목장과 후치신사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방공호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8월 10일, 뜨거운 잔해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쓰비시무기제작소, 야마자토(山里)초등학교, 그리고 오른 편에 위치한 시로야마(城山)초등학교 등 커다란 건물은 아직도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아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선 채로 불타고 있는 건물을 제외한 목조 가옥은 모조리 불에 타 버려서 일대는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온통 불에 탄 대지를 바라보며 어머니와 형도 가망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처음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이 나기 시작하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처음으로 인간다움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가타오카 선생과 헤어져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발밑의 잔해가 아직 뜨거웠습니다. 뜨거운 흙을 밟으며 우라카미천주당 근처까지 다다랐습니다. 매주 일요일 기도를 드리던 천주당이 무참하게 부서져서 벽돌로 된 벽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걸 본 순간 저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했고 ‘힘을 내야 한다, 힘을 내야만 해.’ 하고 되뇌며 집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집이 있던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까지 왔지만 어디가 저희 집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옆집의 이모할머님네도 물론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얼마간을 불탄 자리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숙부님이 살고 있는 우라카미천주당 뒤편의 조노다이라(城の平)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근처를 지나자 동양 제일을 자랑하던 벽돌 건물은 그저 벽돌 더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상용 쌀이 저장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창고의 쌀가마니가 속이 다 드러난 채로 목재와 함께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그저 멍하니 그곳을 지나쳤습니다.
 도중 아는 사람과 만났습니다. 서로가 무사한 것에 기뻐하고 몸조심하고 힘내자는 말을 주고받은 뒤 이것저것을 물어봤는데 다카오마치(高尾町) 부근에서 우리 형을 봤다고 했습니다.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한시라도 빨리 형제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빨라진 발걸음으로 숙부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숙부님 댁은 괜찮을 거야. 피해도 적을 테고.’라는 생각으로 갔지만 그곳도 완전히 파괴되고 불에 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 사촌이 근처 밭에서 끙끙거리며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힘을 내면 살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참아.” 하고 위로해 줄 뿐이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며 여러 얘기를 들어보니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집 안에 있다가 이상한 폭음을 듣고 집에서 뛰쳐나와 쏜살같이 의대 운동장까지 도망친 순간, 번쩍하고 폭발했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는 발끝부터 허벅지 언저리까지가 검푸른 빛이었는데 점차 상반신까지 번져나가는 것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이런 일로 죽고 싶지 않아. 나 좀 살려 줘.”
 그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반복했지만 제게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힘을 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고 말할 뿐,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임종하기 전에 물을 마시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물을 길어서 황급히 돌아와 보니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가슴 언저리까지 독소가 퍼진 듯 검푸르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물을 마시게 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이 걱정돼서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근처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헐떡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입가에 길어 온 물을 흘려 넣어 주었습니다.
 다카오강(高尾川)의 냇가로 내려가자 그곳에도 물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 물을 눈앞에 두고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물을 줘! 물, 물!” 하고 얼이 나간 눈으로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입고 있던 옷은 모조리 불에 타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저 “물, 물.” 하는 것이 고작인 듯했습니다. 근처에서 솟아나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저는 돌연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너무나도 잔혹한 광경에 이 원수를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는 격앙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곳을 떠나 이곳저곳을 찾아헤매다 드디어 형과 재회했습니다. 형은 오른쪽 두개골이 부서져서 뇌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왼쪽 얼굴에도 화상을 입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오른쪽 얼굴에서 간신히 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정신도 흐릿해져서 “이제 곧 구호반이 올 거니까 괜찮아.”라거나 “마지막에는 일본이 이길 거야.” 하는 둥 헛소리를 해댔습니다. “물을 줘, 물!” 하고 몇 번이나 애원해 왔지만 물을 마신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봤기 때문에 “물을 마시면 죽으니까 참아야 돼.”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 사이 형수님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진료소(우라카미 제1병원) 아래에 임시 구호소가 생겼어.” 하는 형수님의 말을 듣고 당장 형수님과 함께 형을 그곳까지 옮겼습니다. 형은 점점 쇠약해졌고 “물, 물!” 하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상처 부위에 요오드팅크를 바르게 한 뒤 물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걸 한 모금 받아 마시고 안도했는지 형은 형수님의 팔에 안겨 숨을 거뒀습니다.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무런 단서가 없어 불분명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혼자가 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형수님의 친정이 있는 대학병원 옆의 사카모토마치(坂本町)로 가보았지만 그 일대도 가옥이 형체도 없이 날려가 있었습니다. 그 옆을 흐르는 개울은 파괴된 가옥의 목재나 기왓장으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불에 탄 나무들이 마치 종말을 맞이한 세계의 나무처럼 비실거리며 뻗쳐 있었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밤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야외에 그대로 드러누워 죽은 듯이 잠들었습니다.
 후에 알아보니 기도한 사람이 제 처의 아버지였습니다.

마쓰야마마치의 고지대에서 바라본 우라카미천주당 방면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8월 11일, 시신을 태우다

 오늘이야말로 숙부님이 돌아와 있을 거란 생각에 우라카미천주당 뒤편의 자택으로 가 보았습니다. 다행히 숙부님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을 모두 잃고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불타 버린 허허벌판 위의 큰 건물에서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 야마자토초등학교, 대학병원, 미쓰비시무기제작소, 그리고 미쓰비시제강소 등의 건물이 불을 끌 수단이 없어서 완전히 불에 탈 때까지 방치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떡하면 좋을까요?”
 “내 먼 친척인 후카호리(深堀)를 찾아가 보자.”
 “좋아요. 그리로 가요.”
 그렇게 해서 몸을 일으킨 숙부님과 함께 그리로 향했지만 당연히 그곳 또한 전멸된 상태였고 후카호리 씨의 어머니는 방공호 안에서 곧 숨을 거두려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의식이 없었습니다.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재를 모아 폭사한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거들었는데 마치 어떠한 물체를 태우는 듯한 느낌에 그저 아무 표정도 없이, 불쌍하다던가, 끔찍하다던가 하는 감정도 일체 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이상한 심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신을 옮길 때 차갑게 굳어버린 손을 만지자 마음속까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일대는 집 주위로 밭과 논이 있어서 날려간 집의 가재도구가 밭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주워 모아 방공호 입구까지 옮겼습니다. 방공호 안은 부상자로 가득해서 우리 같이 멀쩡한 사람은 야외에 다다미를 깔고 쉬었습니다.
 정육점을 하던 후카호리 씨는 죽어 가는 소를 처리해서 근처 사람들에게도 나눠줬습니다. 밭에서 감자나 호박을 따 와서 고기와 함께 삶아 먹었습니다. 이런 맛있는 식사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기운이 났습니다.
 방공호는 부상자들로 꽉 찼기 때문에 밤에는 방공호 바깥에서 모기장을 치고 잤습니다. 피폭한지 이틀째의 밤이었습니다. 밤하늘 가득 별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8월 12일, 6살 난 아이의 죽음

 후카호리 씨의 6살 난 남동생이 야마자토초등학교로 실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로 가 보자 전신이 상처와 피투성이였습니다. 밥도 먹지 못했는지 앙상하게 말라서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토록 천진하고 순진한 아이를 어른들의 전쟁에 희생시키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점점 감정이 벅차올라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아무리 끔찍한 상황과 마주해도 손톱만큼도 인간다운 감정이 일지 않았습니다.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보는 것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현재는 본래의 정신 상태를 회복했습니다. 원폭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누구라도 결코 원폭을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원폭을 사용한다는 것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일본인들 모두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 알아야 하고 또한 그 사실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 십자가

 원폭이 투하됐을 때 목조로 된 저희 집은 토대부터 날려가 어머니도 행방불명이 되었고, 물론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도 어딘가에서 무더기로 불에 타버렸습니다. 땅이 그대로 드러난 집터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찾고 있으니 마침 기초석 뒤쪽에서 어머니가 항상 제단에 올려두고 기도를 드리던 나무 십자가가 신기하게도 원폭의 열풍을 피해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대신한다고 여겨 지금도 저희 집 제단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피폭 후 58년을 살아온 사람들과 미래를 살아갈 자손들을 위해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쟁은 인간이 벌인 일이자 악마의 소행입니다.”라는 말이 피폭의 땅 일본에서 세계를 향해 발신되었습니다. 피폭한 이 십자가가 미래를 지켜줄 것이라 확신하기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대신하는 어머니와 형, 그리고 수많은 원폭 희생자 여러분께 기도를 올리며 평화의 소중함을 체감합니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매일을 기도하듯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저의 서투른 원폭 체험기를 실어 주신 라이온지에 감사드리며 원폭의 무시무시함이 전해진다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히라야마 가네노리/저술
『한여름의 악몽, 나무 십자가』에서 발췌

천주당 뒤편의 자택으로 서두르다

【집필자】
후카호리 시게미(深堀 繁美)
(당시 13세)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오우라에서 우라카미로

 저는 신부가 되기 위해 오우라(大浦)천주당에 있는 나가사키공교(公教)신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도료(東陵)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신학교에는 신부가 되기 위해 우라카미(浦上)에서 온 신학생들이 10명 정도 있었습니다.
원폭이 투하된 뒤인 8월 10일 오후부터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러 오우라에서 우라카미로 향했습니다. 약 5km 남짓의 거리였지만 물론 걸어서 갔습니다. 나가사키역을 지난 지점부터 전차는 아랫부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골의 흔적도 남아 있었습니다. 원폭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타 허허벌판이 되어버렸으니 길이라고 해도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길을 지나서 왔습니다. 가장 지나기 수월하다고 생각한 곳은 지금의 폭심지를 흐르는 시모노카와(下の川)라고 하는 강이었습니다. 강 속을 걷자 강은 새카맣게 탄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제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물, 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화상에는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강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강물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곳이 폭심지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 옆을 지나오자 우라카미천주당이 보였고 천주당의 탑이 사라진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아아, 우리 집도 가망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폭탄이라면 교회가 바로 뒤편에 있는 집을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것이라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지만 탑이 사라진 것을 보니 이제 우리 가족도 틀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상대로 되기는 했지만 형이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형제 여섯 중 누나 둘과 남동생,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카사코(赤迫)에 있는 미쓰비시(三菱)무기공장의 방공호 안에서 작업을 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시는 비상식으로 쌀과 통조림을 넓은 장소에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에도 쌀과 통조림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튿날 5시 무렵부터 통조림이 파열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습니다. 아버지와 집이 있던 터에서 재회했을 때는 그 어떤 말이나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방공호로 가 보았더니 십 수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끓인 물을 얻어마시고 신학교로 돌아간 날부터 설사를 했습니다. 사흘간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하마구치마치(浜口町)의 공장에서 일하던 한 학년 위의 선배들이 산을 넘어서 돌아왔습니다. 화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그 이튿날 죽었습니다.

우라카미천주당 부근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나가사키 원폭의 전후 역사를 남기는 회/편찬
『원폭 투하 후 70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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