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피폭 75주년 기획전“남기고 싶은 그날의 기억 -집필 보조 체험기에서 발췌-”

원폭 투하 후 나가사키에서 시신을 운반하다

<증언자> 마쓰오 마사유키(松尾 昌幸) 씨(89세)

폭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현재 나가사키시(長崎市) 시모쿠로사키마치(下黒崎町)에서 나고 자란 마쓰오 마사유키 씨.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당시는 15살이었습니다. 구로사키 지구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폭음이 들렸다’고 마쓰오 씨는 회상합니다. 이튿날은 경방단으로서 나가사키 지원 업무에 파견되었고 폐허 속에서 정신없이 시신을 실어 날랐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됐을 무렵의 생활

 저는 1929년 11월 10일에 지금의 나가사키시 시모쿠로사키마치(피폭 당시는 니시소노기군 구로사키무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시게이치(繁一), 어머니 성함은 오모(オモ)입니다. 여섯 형제 중 장남이었습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12월 8일은 국민학교 6학년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는 배우지 못했죠. 밭에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수확한 쌀은 군인들을 위해 공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뽕나무나 종려나무의 껍질도 군대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공출했습니다. 근처 주민들이 소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출정하시기 전에는 사업으로 상해에 가 계셨습니다. ‘가와나미 샐비지’라는 회사였는데, 가라앉은 수송선을 끌어올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50살 정도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상해에 계실 때 소집 영장이 나왔는데 구로사키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상해에서 바로 아이노우라(相浦) 해병단에 입대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전쟁에 가서 없으니까 구로사키의 노인들은 미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대나무를 뾰족하게 잘라 무기를 만들어서, 만일의 경우에 적을 공격할 수 있게끔 대비를 했습니다.
 전시 중에도 구로사키에는 밭이 있었기 때문에 먹을 건 있었습니다. 고구마와 밀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사러 나가사키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근 지역은 공습이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B29를 목격한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잘못 떨어트리기라도 했던 건지, 근처의 아무것도 없는 산에다 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그 뒤처리를 하러 가라는 관청의 지시를 받고서 폭탄의 파편이나 철판 등을 실어 날랐습니다.
 또 어떤 때는 출정이 결정된 군인들이 구로사키에서 배를 타고 출항했는데, 그 배를 노리고 B29에서 공습을 가해서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작은 배로 구조에 나섰지만 전쟁터에 가보지도 못하고 군인들이 애석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 원폭이 투하된 날과 시신 운반 작업

 1945년 8월 9일, 원폭이 투하되던 당일에는 관청에 가 있었습니다. 공습경보가 해제돼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때에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고, 그 후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무시무시한 소리였습니다. 구로사키 일대는 나가사키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폭풍이 불지는 않았습니다.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걸 알게 된 이튿날 저녁, 구로사키에서 2, 30명 정도 되는 경방단원을 모아 나가사키에 지원을 보내기로 됐습니다. 저는 경방단원 중 최연소인 15살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전쟁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경방단원은 나이 든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구로사키에서 작은 배로 먼바다까지 나간 뒤 감시선으로 갈아타고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끝에 갈고리가 달린 도구와 들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배는 나가사키의 오하토(大波止)에 가 닿았습니다. 나가사키는 아직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무슨 냄새인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고약한 냄새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꺼림칙한 냄새였습니다.
 방공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 트럭을 타고 시로야마(城山)로 향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배가 부풀어 오른 소와 말 등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습니다. 논 안에도 사람이 죽어 있었습니다. 오하시(大橋)의 강에서는 아기가 곧 태어날 것 같은 상태로 죽어 있는 임산부를 보았습니다.
 도중에 다친 사람들이 “물을 마시게 해 주시오.” 하고 호소해 왔지만 어른들은 제게 물을 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마시게 하고 싶었지만 줄 수 있는 물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저희 분단은 시신을 들것에 싣고 화장터로 나르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무너져내린 가옥에서 시신을 꺼내 운반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차례로 들것에 실어서 옮겼는데 그 사람들의 신원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름이고 뭐고 알 수 있는 게 없었죠.
 도중 B29가 정찰을 목적으로 비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함석과 잔해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었습니다. 또 폭탄을 떨어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시신을 옮기는 작업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시신의 팔을 잡아당기면 피부가 훌렁 벗겨졌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도무지 작업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나중에는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냄새는 지금껏 맡아본 적 없는 지독한 냄새였습니다.
 밤에는 이비노쿠치(井樋の口)의 방공호 안에 잔해에서 건져낸 판자 등을 깔고 잤습니다. 둘째 날에는 다케노쿠보(竹ノ久保), 지금의 하루키마치(春木町) 근처였을까요? 여하튼 그곳에 시신을 옮기러 갔습니다. 둘째 날에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아서 묵묵히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이사하야(諫早)에서 주먹밥을 보내왔지만 8월의 찌는 날씨 탓에 음식이 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 속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가장 어린 제가 허리에 밧줄을 감고 우물에 들어가 시신을 밧줄로 묶고 끌어올렸습니다. 몇 번이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 작업을 했습니다. 우물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분단은 이틀간 작업을 했습니다. 나가사키에 갈 때는 배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꼬박 하루를 걸려 걸어서 구로사키에 돌아왔습니다. 저희 구로사키 분단 외에도 가까운 지역의 분단도 나가사키로 지원을 갔던 모양입니다만, 다른 분단은 하루만 작업을 하고 바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께서는 제가 입고 있던 옷을 전부 태웠습니다. 고약한 정도를 넘어선 엄청난 악취가 배어 있었으니까요.
 원폭 투하 후에 시신 운반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시신을 다루는데 익숙할 것이라는 이유로, 인근 해변가로 밀려온 목 없는 군인의 시신을 손수 화장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마 어뢰에 그리됐던 것 같아요. 군복을 입고 있어서 신원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시신이 해변가로 떠내려오는 일이 꽤나 자주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에 다녀온 뒤로는 정기적으로 예방 차원에서 근처 병원에 주사를 맞으러 다녔습니다. 같은 경방단원으로 나가사키에 파견됐던 사람들 중에 일찍 세상을 떠난 분이 계셨습니다. 아내분의 친척도 원폭 투하 후 나가사키에 친척을 찾으러 갔다가 그 후에 바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나가사키에 파견된 경방단원 중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함께 갔던 경방단 사람들 모두 지금은 돌아가셨지요.

화장터에 대해

 이틀간 몇 백구나 되는 시신을 들것에 싣고 화장터로 옮겼지만 그게 어디였는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원폭 증언 활동을 하셨던 이케다 사나에(池田 早苗) 씨도 죽은 동생을 업고 화장터로 데려가셨던 모양입니다. 전후에 이케다 씨와 “그때 강 근처에 있었던 그 넓은 화장터가 대체 어디였을까요?” 하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결국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화장터에서는 시신을 남녀로만 나눴습니다. 갓난 아기와 노인도, 남자와 여자로 나눠질 뿐입니다. 그렇게 모인 시신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화장됐습니다. 아마 시청 직원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희는 죽은 사람들을 옮기기만 했고요.
 훗날 유골을 찾으러 유족들이 시청으로 찾아왔지만 남자는 이쪽 유골 더미에서, 여자는 저쪽에서 가지고 가는 식이었습니다. 성별로만 나눠졌지 결국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유골을 가지고 돌아간 셈입니다. 저도 친척이 원폭으로 죽었기 때문에 걸어서 나가사키까지 가서 현청과 시청을 오가며 유골을 건네받았습니다.

종전 후

 종전 후에도 그 일대가 밭이었기 때문에 먹을 걸로 곤란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나메시(滑石)고개를 넘어 먹을 걸 구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아기를 업고서 거기까지 온 여성도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손에 넣은 식량을 경찰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식량을 구하는 게 불법이었습니다. 빼앗은 식량은 어떻게 했을까요?
 전후에는 신발이 없어서 짚신이나 게타를 신었습니다. 게타의 끈도 짚으로 만들었습니다. 포장된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짚신 안으로 돌멩이가 들어오면 맨발로 걷기도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신발이 배급되었지만, 마을 사람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을 아니었기 때문에 추첨을 해서 배급하는 식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도 공부는 할 수 없었습니다. 넓은 밭이 있는 집에 가서 고구마나 밀 재배를 거들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철공소에 다니기도 했고 건설 작업원 등의 일에 종사했습니다. 마쓰시마(松島)건설과 탄광이 있던 이케시마(池島)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55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그 뒤로도 구로사키에서 계속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폐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반년에 한 번 원폭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원폭 투하 직후에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원폭이 떨어진 직후 나가사키에 들어갔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어서 피폭자 수첩도 받지 못한 채 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젊은 세대에게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식량 부족 등과 같은 문제로 곤란을 겪습니다. 같은 인간이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 출신의 사람이라고 차별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0월 8일 나가사키시 시모쿠로사키마치의 자택에서 수록〉

상공에서 바라본 시로야마국민학교 일대
촬영: 미군,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증언자> 우라카와 다이지로(浦川 大次郎) 씨(86세)

 나가사키시(長崎市) 가타후치마치(片淵町)에서 나고 자란 우라카와 다이지로 씨. 피폭 당시는 가미나가사키(上長崎)국민학교의 6학년생이었습니다. 학도동원으로 니시야마(西山)에 올라갔을 때 피폭했습니다. 동급생과 가까스로 찾아간 수원지에서 목격한 것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전쟁과 원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피폭 이전의 생활

 1933년 6월 10일에 나가사키시 가타후치마치에서 태어난 이래로, 줄곧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당시는 어머니와 할머니, 누나 셋, 이렇게 7명이서 함께 살았습니다. 형은 군대에 가 있었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저는 국민학교 3학년 무렵까지 몸이 허약했고 키 순서대로 줄을 서면 항상 첫 번째였습니다.
 저희 집은 400년간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덕에 전쟁 중에도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학급의 절반 정도는 식량 부족을 겪었습니다. 국민학교 때의 선생님도 저희 집에 먹을 걸 얻으러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반장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죽창 훈련을 받았습니다. 대나무 끝을 뾰족하게 자른 후 불로 살짝 지져서 만든 죽창을 들고 훈련용 인형을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겁니다. 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지만, 지도를 맡은 군인은 강압적이어서 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든 가짜 고사포 모형으로 비행기를 조준하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에도 B29가 날아와 소이탄을 떨어트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가지에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실수로 히코산(彦山)과 미네화산(峰火山)에 걸쳐서 투하했습니다. 시가지에 떨어졌더라면 아마도 큰 화재가 일어났을 겁니다. 소이탄이 수직으로 떨어지게끔 폭탄에 5미터 정도 길이의 끈을 붙여놓습니다. 그 끈이 예뻐서 그걸 주우러 미네화산에 간 적도 있었지만, 나뭇가지에 뒤엉켜 땅에 떨어진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학도동원으로 송진을 채집하러 니시야마에 올랐습니다. 학교는 남자반, 남여반, 여자반, 이렇게 3반으로 나눠져 있었고, 저는 그중 남자반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저희 남자반 아이들에게 송진 채집이 맡겨졌습니다. 니시야마에는 큰 소나무들이 우거진 송림이 있었습니다. 소나무에 상처를 내서 뚝뚝 흘러내리는 송진을 양동이에 모아서 학교에 가지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송진을 비행기의 연료로 사용한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어디에 사용됐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니시야마에는 아침부터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저녁까지 있었습니다. 중노동까지는 아니었지만 송림이 있는 곳까지 30분가량 산을 올라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피폭한 날의 일

 8월 9일도 학도 동원으로 니시야마에 가 있었습니다. 군대가 이동하기 위해서 폭이 3미터 정도 되는 좁은 군용 도로가 나 있었는데, 니시야마에 갈 때는 그 길을 지났습니다. 군용 도로는 시민을 동원해 만든 것인데, 전부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정말 고된 작업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현청 위를 노리고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폭탄이 바람에 휩쓸려 우라카미(浦上)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니시야마에서 쭉 지켜봤습니다. 둥근 물체를 매단 낙하산이 둥실둥실 떠내려 왔죠. “저게 뭐야?”라고 하면서 지켜봤습니다. 그 뒤 낙하산은 산속으로 들어가 폭발했습니다. 폭탄이 떨어졌을 때는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을 뛰어넘는 위력의 폭풍이 훅 하고 불어닥쳤고, 그다음 순간 번쩍하고 빛이 번쩍여서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 일대에 있는 집들 대부분이 초가지붕이었어요. 빛이 번쩍인 순간 지붕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저희들이 목격한 것은 몇 십 채나 되는 집들이 불에 타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도시락이며 도구를 산에다 팽개치고 서둘러 군용 도로를 통해 야가미(矢上)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산속을 이리저리 헤메고 있는 사이, 하늘이 컴컴해지고 태양은 새빨갛게 변습니다. 그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이 섞인 비였습니다. 입고 있던 새하얀 여름 셔츠가 시커멓게 됐습니다. 3시나 4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태양은 새빨갰고 버섯구름이 하늘을 몽땅 덮어버릴 기세로 퍼져나갔습니다. 산속을 몇 시간이나 헤매면서 도망쳤습니다.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하면서요. 반 아이들 2, 30명이 모두 한데 뭉쳐서 이동했습니다. 니시야마마치(西山町) 4초메(丁目)까지 갔더니 모토하라(本原)부터 수원지 뒤쪽까지 이어진 길은 줄지어 걷고 있는 피폭자들로 가득했습니다. 폭탄의 열로 머리카락이 타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수원지에 다다른 뒤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2,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길에 다들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증상이 심각한 사람은 수원지 물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물을 마셔댔습니다.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10명, 20명 정도가 아닙니다. 누군가 일부러 물가에 사람들을 줄지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는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고, 누워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죽은 건지 살아 있는지,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서 사람을 타고 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수원지로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원폭이 떨어졌을 때 도랑에 엎드리셨던 모양으로 온통 진흙투성이였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하고 물으니 “도랑 안으로 엎드렸지 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원지에 들어가서 씻어내는 게 어떠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수원지 주변에는 얼굴을 물 안에 집어넣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원지에 들어가서 진흙투성이가 된 옷을 씻었습니다.
 밭에 나가 계셨던 아버지는 원폭이 떨어졌을 때 밭고랑에 엎드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덕에 아무 곳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집에 계셨다고 했습니다. 누나는 당시 시립 여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학도동원으로 사이와이마치(幸町)에 있는 미쓰비시(三菱)무기공장에 다녔는데, 그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근거리에서의 피폭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현관 신발장에 놓인 누나의 도시락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제가 돌아오질 않으니, 걱정되신 아버지께서 집 근처의 나가사키대학 경제학부 쪽까지 나와 계셨습니다.
 현재 집 근처에 있는 마을회관 아래로 나루타키(鳴滝)까지 이어지는 수도 터널이 나 있었습니다. 바위를 깎아낸 게 전부인, 텅 비어있는 그 터널을 방공호로 사용했습니다. 원폭으로 살고 있던 집이 엉망진창이 돼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서 뜯어온 나무 문을 터널 안에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지역 사람들만 터널을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도 피난해 왔습니다. “들여보내 주시오.” 하며 끝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터널 안은 금세 사람들로 꽉 차버렸습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부상자들의 팔다리에 난 상처에서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의사도 없었기에 아버지께서 집에 있던 빨간약(요오드팅크)으로 소독을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도 머지않아 어딘가로 가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건지, 그게 아니면 죽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터널에서는 한 달도 채 머물지 않았어요. 폭풍으로 기울어진 집은 목수에게 부탁해 바이스(※끼워서 고정시키는 장치)로 기울기를 바로잡고 기왓 지붕도 깨끗이 고쳤습니다. 작업은 2, 3개월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수리할 동안은 기울어진 집에서 그대로 지냈습니다.

구호, 복구 활동

 군의 명령으로 경제학부 운동장에 부서진 가옥의 목재를 모아서 불을 붙였습니다. 쌓아올린 목재 위로 큰 수레 가득 실어 온 시신을 휙휙 내던졌습니다. 그게 며칠이나 계속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하여튼 원폭이 투하된 뒤부터 며칠간 계속됐습니다. 시신을 실어 와서 불에 태우는 일이 말입니다. 한곳에서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계속해서 태우는 게 불가능했던 모양인지 다음은 저기, 그다음은 저기에서 하는 식으로 장소를 바꿨습니다. 누군가가 목재를 가져오면 다른 누군가가 시신을 날라와서 불을 붙이고는, 한 번에 10명, 20명을 쉴 새 없이 태웠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꺼번에요. 태운 뒤에 나온 뼈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아직 6학년생이었으니 도울 수도 없었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수레에서 시신의 손이나 발이 삐져나오는 걸 봐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매일같이 시체 위를 걸어서 돌아다녔으니 감각이 마비된 걸 테죠.

종전 후

 그것이 원폭이었다는 걸 안 것은 며칠이 지난 뒤였습니다. 라디오에서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아요. 라디오도 집집마다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근처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들었습니다. 종전을 알게 된 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였습니다. 때마침 점심 무렵이 됐을 때였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딱히 감격스럽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여러 면에서 둔감해져 있었지요.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가타후치마치(片淵町)에 진주군이 들어왔습니다. 가타후치마치에는 주류군의 숙사가 있어서 외국인이 이삼백 명 정도 살았습니다. 제게는 필리핀에서 태어나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매일 같이 군인들의 숙사에 놀러 갔는데, 때로는 밥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카레 같은 군대식은 거의 대부분이 통조림이었습니다. 사용하는 식기도 일반 밥그릇이 아닌 알루미늄제였습니다. 다들 “꼬마야, 꼬마야.” 하면서 저희를 귀여워해 줬습니다. 초콜릿이나 담배 등 여러 가지를 주머니에 가득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받은 건 다른 친구들과 나눴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나는 미국인들이 싫구나. 그러니 자꾸 그런 걸 받아오지 말거라.” 하고 혼을 내셨습니다. 아버지께 있어서 미국은 적이었으니까요.
 학교는 여름방학 기간이기도 했고 선생님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 쉬었습니다. 여자 선생님만 계셨지 남자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그 뒤 지금의 사이세이카이병원(済生会病院)이 있는 곳에 나가사키상업학교가 세워졌고, 저는 바로 시험을 쳐서 입학했습니다. 1년 정도를 그곳에서 공부했고 그 후로는 니시고(지금의 아부라기마치)에 있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무렵은 전차가 우라카미역까지만 다녔기 때문에 우라카미역에서 니시고까지는 걸어갈 수밖에 없어서 정말 멀게 느껴졌습니다. 학교는 콘크리트 건물이었지만 유리창이 전부 깨져서 틀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겨울에는 유리창을 대신해 종이를 붙여서 추위를 견뎠습니다. 학교에 집이 숯 장사를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가방에 숯을 한가득 넣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숯으로 피운 불을 쬐면서 공부했습니다. 마룻바닥도 불에 타서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불을 피워도 전혀 문제 될 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죠.
 저는 의외로 큰 고생 없이 자랐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고등학교에는 가지 못했던 친구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터로 나가는 게 드문 일이 아니어서, 학급의 절반 정도가 그랬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살기 위해서는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제 친구는 아마도 가계도가 2미터는 될 법한 나가사키 봉행소(奉行所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던 관청)의 가로(家老 ※다이묘의 중신)네 집 자손이었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는 못 갈 것 같아.” 하고 중학교를 마친 뒤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옛날에 권력이 있었다고 해도 전쟁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돼 버려요.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한데요.

 저는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스무 살이 됐을 무렵 아버지께 밭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야채를 전문으로 하셨는데 80킬로, 90킬로나 되는 호박이나 무 등을 늘 짊어진 탓에 등 뼈가 휘었습니다. 저는 몸집이 작아서 이대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꽃을 재배하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너 좋을 대로 해라.” 하며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그 무렵에 나가사키현의 개량 보급소가 젠자마치(銭座町)에 생겼는데 야채와 꽃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원이 근무했습니다. 그곳의 기술원에게 기술을 배워서 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많았을 때는 하우스를 24, 25동 정도 만들었고 신다이쿠마치(新大工町)에 있는 꽃 시장에 일사천리로 출하했습니다.

전후의 식량 사정

 오무라(大村)에 조선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보따리장수로 불리던 여자가 술병이 든 얼음 꾸러미 대여섯 개를 등에 짊어지고 술을 팔러 다녔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술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술도 배급제였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할 수 없었는데, 저희 집에는 한 되짜리 병에 든 술이 5, 6병씩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경찰도 알았는지, 근처 파출소의 순경이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시간을 노리고 집에 찾아왔습니다. 술을 넘기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투였습니다.
 저희 집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먹을 걸로 곤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중에도 오세치(※정월에 먹는 일본의 명절 요리)를 만들어 먹었으니까요. 저희 밭으로 마을 사람들이 호박 등을 사러 오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구마 줄기 같은 건 맘대로 가져가게 하셨습니다. 큰 야채일수록 값을 좋게 쳐줬기 때문에 호박 등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야채를 잔뜩 가지고 가서 옷감과 바꿔왔습니다. 옷가지도 부족했기 때문에 감사의 의미가 됐겠죠.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것

 저와 같은 장소에서 피폭한 친구들 중 3명은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에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중 대학을 나와 상사(商社)에 입사해서 독일로 부임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뒤 백혈병에 걸려서 일본으로 돌아왔고 결국은 죽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스스로가 신체에 피폭의 영향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피폭을 겪지 않은 분들이 증언 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폭자 본인이 직접 증언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저는 지금 86살이 됐지만 이대로라면 100살까지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저도 증언자로서 활동을 해 보고 싶습니다.

〈2019년 10월 8일 나가사키시 가타후치의 자택에서 수록〉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전쟁과 핵무기는 용납할 수 없다

<증언자> 도모키요 시로(友清 史郎) 씨(93세)

 나가사키(長崎)의과대학 물리요법과(현재의 방사선과)의 기술자였던 도모키요 시로 씨는 나가사키의과대학부속병원의 실내에서 피폭했습니다. 당시 조교수였던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 박사가 도모키요 씨의 상사였습니다. 피폭 직후 나가이 박사와 함께 나가사키의과대학 제11 의료대(물리적요법과반, 대장 나가이 다카시)에 소속되어 부상자의 구호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에 여러 번 소개되었습니다. 원폭으로 아버지(도모키요 하루오)와 많은 동료들을 잃었습니다.
 도모키요 씨는 올해 처음으로 평화기념식전에 참석했습니다.

피폭 이전의 생활

 저는 나가사키현립 게이호(瓊浦)중학교를 졸업해서 나가사키의과대학부속병원의 물리적요법과에서 기술자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제 상사는 나가이 다카시 조교수였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정신없이 바빠서 환자들의 욕실을 빌려서 씻거나 병실 침대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습니다.
 1945년 당시는 아버지가 빌려주신 나가사키시 시로야마마치(城山町)에 있는 시영 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니시소노기군(西彼杵郡) 오세토초(大瀬戸町) 마쓰시마무라(松島村)에서 신용 조합장과 면의회 의원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쌀을 가지고 수시로 저를 보러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셔서 자주 반주를 하셨는데 나가이 선생님과는 술친구셨습니다. 술을 들고 선생님댁으로 가서 같이 드시곤 하셨습니다. 나가이 선생님도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나가이 선생님께는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종종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나가이 선생님댁에 술을 갖다 드린 적도 있습니다.

1945년 8월 9일에 일어난 일

 1945년 8월 9일 아침, 병원에 출근하던 도중 이나사바시(稲佐橋) 근처에서 마침 오세토초 마쓰시마무라에서 쌀을 가지고 올라오신 아버지와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쌀을 가지고 하숙집에 가 있으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는 거기서 헤어졌습니다.

 10시 50분 무렵 나가이 선생님께서 “시로, 아직 이르지만 안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자꾸나.” 하고 말씀하셨기에 병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원폭이 떨어졌을 때는 같은 기술자로 일하던 시케이세이(施景星) 씨와 함께 투시실에 있었습니다. B-29가 원폭을 투하한 직후의 급상승하는 엔진 소리였던 것 같지만, 지근탄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주황빛의 섬광이 번쩍인 뒤 몸이 들어올려지는 것 같은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쳤고, 주위가 새까맣게 어두워졌습니다.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내려서 탁구대 정도 크기의 큼직한 책상 아래로 급히 몸을 숨겼습니다. “아무래도 파묻힌 것 같죠?” 하는 이야기를 시(施) 씨와 나눴습니다. 잠시 뒤 몸이 젖어있다는 걸 깨닫고 시 씨에게 말했습니다. 시 씨는 “뜨거워요? 아니면 차가워요?” 하고 물었고 “차가워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양동이가 뒤집히면서 담겨있던 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습니다.
 상황이 진정된 뒤 나가이 선생님을 찾으러 시 씨와 함께 위층의 촬영실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책장 밑에 깔려 피를 흘리고 계셨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습니다. “도모키요, 쓰노오(角尾) 학장님이 외래 진찰을 가 계실 거야. 학장님을 찾아봐 다오.” 하는 선생님의 부탁에 진찰실로 갔습니다. 그러자 학생들과 함께 쓰러져 있는 쓰노오 스스무(晋) 학장님이 보였습니다. 학장님은 몸 곳곳에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가지고 있던 삼각건으로 늑골 부위와 오른쪽 대퇴부(골절되어 있었습니다)를 결박한 후 나가이 선생님의 지시로 학장님을 엎고 병원 뒷산의 아나코보(穴弘法) 아래로 데려다 눕혔습니다.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거리를 내려다보자 집과 건물들은 모조리 파괴돼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폭탄이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원자폭탄’이라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에, 그걸 원폭이라고 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용케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상자의 구호활동에 가담하다

 병원 뒤편에 있는 아나코보절 아래의 언덕과 밭에서 부상자들의 구호를 했습니다. 나가이 선생님도 아나보코 아래의 밭에 계셨습니다. 귀 주변에 난 큰 상처에서 피가 나서 붕대를 감고 계신 모습이었습니다.

 실외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살려주세요!” 하고 저마다 외쳐댔습니다. “뒤편의 밭으로 가 주세요.” 하고 사람들을 유도했습니다. 부상자들의 손을 잡고 뒤편의 밭으로 직접 데려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 스스로도 얼굴과 팔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이상의 구호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병원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모두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습니다.

 아나코보의 언덕에 쓰노오 학장님을 데려다 놓았을 때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 빗물을 철모에 받아서 근처에 쓰러져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때는 그 빗물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마시게 해서는 안 됐다고 지금에서야 후회합니다. 다행히 저희들 중 아무도 그 빗물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후에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날 밤은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을 퍼서 밭에 굴러다니던 호박을 주워다 철모에 삶아 먹었습니다. 삶은 호박을 부상자들에게도 나눠줬던 기억이 납니다. 다들 허기진 상태라 맛있게 먹었습니다.

8월 10일 이후

 병원 사유지가 시신으로 가득해졌습니다. 나가이 선생님의 지휘로 나무를 주워다 시신을 태웠습니다. 저와 시케이세이 씨, 히사미쓰(久松) 수간호사, 시쿤잔(施焜山) 씨(교무 보좌원)도 함께했습니다. 무거운 걸 드는 건 젊은 저와 시케이세이 씨가 도맡았습니다.
 피폭 다음날은 폐허를 지나 의과대학 운동장 옆에 있는 약학 전문학교의 방공호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피폭 3일 후 의료대는 나가이 선생님을 도와 미쓰야마코바후지노오(三ツ山木場藤の尾)로 이동해 의과대학 제11 의료대(물리적요법과반, 대장 나가이 다카시) 미쓰야마 구호반으로서 구호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우라카미(浦上)천주당에서 출발해 지금의 가와히라(川平)우회 도로 부근을 거쳐 미쓰야마로 이동했습니다. 그때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시청에 가서 건빵 같은 걸 타 오거나, 알아서 근처에 있는 걸 찾아 먹거나 하면서 배를 채웠습니다.
 제11 의료대는 2개월 가까이 미쓰야마에 머물렀습니다. 환자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환자들을 직접 데려와 치료해 주는 활동을 했지만, 의료 기구나 약품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저는 방사선 기사였기 때문에 환자들의 치료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대신 몸을 쓰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현립 게이호중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라 구호활동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폭 후, 형이 이나사바시(다케노쿠보 부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은 구더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형과 함께 아버지를 화장했습니다. 유골을 깡통에 담아 형과 걸어서 마쓰시마무라로 향했습니다. 배가 다니지 않는 데다 거리도 제법 멀었기 때문에, 도착하기까지 반나절이나 걸려서 꽤나 고생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배를 타도 3시간 정도가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한 달 정도를 설사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제가 걱정된 어머니는 감나무 이파리와 비파 이파리 등, 효과가 있다고 하는 건 뭐든 달여서 마시게 했습니다.

종전 후

 저는 원폭이 투하되기 전, 나가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전후에는 나가이 선생님의 뒤를 이어 방사선과 관계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까요.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근무하기 시작한 나가사키시민병원에서 방사선과의 기사장까지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방사선 기사일에 전념하고 싶었습니다. 시민병원, 지케이(慈恵)병원, 주젠카이(十善会), 사쿠라마치(桜町)클리닉, 나가사키유아이(長崎友愛)병원을 마지막으로, 75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중에 다리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매일 아내(히토미)가 직장까지 데려다준 덕에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내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나가사키유아이병원을 퇴직했을 때 “퇴직금 절반은 사모님을 드려야겠네요.” 하는 말을 원장 선생님께서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가이 다카시 선생님의 공적을 기리는 나가사키뇨코회(長崎如己の会)의 감사를 맡았습니다. 현립 게이호중학교 시절에 축구를 했기 때문에 55살 때까지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몸 상태 면에서는 황달, 추간판 탈출증, 심장, 폐암이 의심되는 상황이고 방광암, 대장암 등으로 고생했습니다. 그간 여러 병을 앓아온 것을 편지에 적어서 나라에 보낸 적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은 나가이 선생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합니다. 선생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니까요.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을 때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아내의 권유도 있었고, 선생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올해 처음으로 평화기념식전에 참석했습니다. 선생님의 묘에도 찾아뵐 생각입니다.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끔찍한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안 됩니다. 핵무기도 마찬가집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없는 나라도 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젊은 사람들이 고민해 줬으면 합니다. 다 함께 생각해 봐야 해요. 원폭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원폭으로 가족(아버지)과 동료들을 잃은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저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신세를 졌던 분들이나 돌아가신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입니다. 나가이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던 단 한마디는 ‘신의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나가이 선생님에 대한 것이나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앞으로도 전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10월 30일 나가사키시 고스게마치의 자택에서 수록〉

【참고 자료】
<나가사키의 종> (나가이 다카시 저)
<원자폭탄 구호 보고서> (나가이 다카시 저)
<나가사키 위인전 나가이 다카시> (오가와우치 기요타카 저)

<나가이 다카시 박사와 구호 활동을 경험한 도모키요 씨 「선생님, 감사합니다」>
(2019년 8월 10일 자 나가사키신문 기사)
<나가이 다카시 선생과 함께> -제11 의료대 구호반의 일원으로서-
(증언자) 시케이세이
<나가사키의과대학 원폭 피재 부흥 일지> (시라베 라이스케)

<나가사키의과대학 원폭 기록집 제1권>
(p500: 가네코 마쓰코 씨의 수기, p502: 히사마쓰 시소노 씨의 수기)

연인과의 슬픈 이별

<증언자> 겐조 후사에(源城 房枝) 씨(95세)

 나가사키시(長崎市) 시모니시야마마치(下西山町)에 살고 있는 겐조 후사에 씨는 현재 95세로, 원폭이 투하되던 날 나가사키시 로카스마치(炉粕町)에 있는 자택(구멍가게)에서 어머니, 남동생 셋과 함께 피폭했습니다. 원폭으로 집의 계단 등이 파손되었습니다. 결핵을 앓고 있던 어머니와 남동생들을 데리고 당시 야노히라마치(矢の平町)에 있는 연인의 집으로 피난했지만 연인은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그 뒤 걸어서 히미(日見)터널에서 이사하야(諫早) 방면으로 피난했고, 도중 한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걸어서 이사하야역에 도착했고 기차에 올라 로카스마치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 9일은 연인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피폭 이전의 생활

 저는 1923년 나가사키시 로카스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스와신사(諏訪神社)의 세번째 도리이(鳥居) 근처였습니다. 당시에는 부모님(아버지: 겐조 데쓰노스케, 어머니: 겐조 시즈에), 그리고 남동생 셋(시로, 쌍둥이인 고이치와 슈이치)과 함께 살았습니다. 시로는 미쓰비시(三菱)의 양성학교에서 사무 일을 했고, 쌍둥이들은 양성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후처였습니다.
 1945년은 스와신사가 활기를 띠었던 무렵으로 저희 집은 그림엽서나 토산품, 장난감 등을 취급하는 구멍가게를 운영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해 1월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향년 71세). 같은 해 8월에는 어머니마저 결혁으로 몸 져 누우셨기 때문에 당시 21살이었던 저 혼자 가게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이 귀해서 이사하야까지 식량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이사하야역에서 10리쯤 걸어가면, 아버지가 일본 적십자사에 다니셨을 때의 직장 부하의 친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필요한 걸 얻었습니다.
 어느 날은 고구마를 짊어지고 이사하야역에 있었는데 한 남자가 제게 “이봐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는 있는 거요?” 하고 물어오기에 “네, 알죠.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태평양전쟁 개전 조칙이 발표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날에 먹을 걸 구하러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요?”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게 뻔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됐소. 가던 길이나 마저 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마를 역의 벤치 아래에 숨겨놓고 다음날 고구마를 찾으러 이사하야역에 돌아왔습니다. 당시는 승강구가 아닌 창문을 통해 기차에 탔습니다. 고구마가 든 꾸러미를 먼저 안으로 던진 다음 기차에 올랐습니다. 꾸러미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처량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어머니와 곤피라(金比羅)산의 밭에서 고구마를 몰래 캐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고구마는 가져오지 않고 잎사귀만 뜯어서 가져왔습니다.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하고 전쟁이 증오스럽습니다.

1945년 8월 9일에 일어난 일

 1945년 8월 9일,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어머니와 집에서 밥을 먹은 뒤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번쩍하고 빛난 뒤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나 봐!”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마음에 저희 집 방공호로 냅다 맨발로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엄마, 빨리 들어와요!” 하고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찌 됐든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귀중품은 내버려 두고 어머니와 방공호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남동생(시로)은 미쓰비시 양성학교에서 사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밤새도록 잔업을 하고 아침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2층에서 자고 있었는데 계단이 날아가서 없어졌기 때문에 “누나, 어떻게 된 거야? 내려갈 수가 없어.” 하고 제게 소리쳤지만 “어떻게든 알아서 내려와야 해.” 하는 말 밖에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동네 아이들과 밖으로 놀러 나간, 15살이 된 쌍둥이 남동생들(고이치와 슈이치)을 찾아 거리로 나갔습니다. 쌍둥이 중 한 명은 유리 파편에 머리를 다쳐 있었습니다. 다쳤다고 제게 호소하는 동생을 가쓰야마(勝山)국민학교에 있는 구호소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삼촌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적기 내습! 적기 내습!” 하고 실성한 듯이 외치며 집 앞에 있는 전봇대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야마(竹山)주점 앞에 있는 방공호로 쌍둥이들을 데리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방공호 안에는 (다테야마 부근에서 온) 3~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얼굴이 두 쪽으로 갈라져서는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는데, 피가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남자는 제발 살려달라는 눈으로 저를 쳐다봤지만 무서워서 말을 걸 수조차 없었습니다. (남자에 비하면) 동생의 상처는 별것 아니었습니다. 방공호 밖으로 나와서 “여기 다친 사람이 있어요!”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정신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남자를 내버려 둔 채 동생들을 데리고 방공호를 빠져나왔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른 방공호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목이 잘린 아기를 들쳐 업고 있는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가쓰야마국민학교의 구호소로 문짝에 실린 부상자들이 줄줄이 도착했습니다. 동생의 상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해, 구호소에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어머니와 상의했습니다.

만남을 약속했던 연인과의 갑작스러운 이별

 사실 그날(9일)은 야노히라마치에 살고 있던 연인과 신다이쿠마치(新大工町)에서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연인에게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야노히라마치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이의 아버지가 미쓰비시제강소에 근무 중이던 그를 찾으러 갔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가 그이의 유골이 담긴 상자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공장에는 죽은 사람들이 많아서 누구의 뼈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략 아들이라고 짐작되는 뼈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오늘 오빠는 한 벌 밖에 없는 좋은 옷을 입고 나갔다고요!” 하고 실성한 그의 여동생이 제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와 영화를 보러 가려고 일부러 아끼던 옷을 꺼내 입었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습니다. 상자에 담긴 그의 유골에 합장을 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을 데리고 로카스마치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주하치(十八)은행에서 중역을 맡고 있는 이웃의 따님이 아이를 업고 “가족들이 집으로 들여보내 주질 않는데 어쩌면 좋아요?” 하고 하소연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 다른 사람을 돌봐줄 형편이 못 됐습니다. 그저 “그래요?” 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업혀 있던 아이는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아직도 신경이 쓰입니다.

혼고우치에서 히미터널 방면으로 피난하다

 그 뒤로 사령부(현재의 일본은행 나가사키지점)에서 ‘부녀자들은 피난하라’는 내용의 회람이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는 어찌되도 괜찮으니 너만이라도 피난하려무나.” 하고 말씀하셨지만 아픈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고 도망갈 수는 없었습니다. 근처의 빈집에서 유모차를 가져와서 어머니를 태우고 당분간 먹을 쌀과 식량 등을 챙겼습니다. 그렇게 동생들과 유모차를 밀면서 정처 없이 혼고우치(本河内) 쪽을 향해 도망쳤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줄지어 피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히미터널 저편에서 트럭을 탄 일본군이 “유언비어에 선동되지 말고 다시 돌아가라!” 하고 외치며 달려왔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야 해.” 하고 모두들 텅 빈 눈으로 말했습니다.
 도중 유모차가 고장 나버렸고, 히미터널의 출구에서 “엄마, 이제부터 걷지 않으면 안 돼요.” 하고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래. 힘내서 걸어볼게.” 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간을 걸으니 주위에 점점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밤은 밖에서 노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왼편에 대문이 으리으리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와 “죄송하지만 하룻밤만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하고 부탁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이 다다미 4장 반 정도 크기의 방에 이불을 깔아주고 모기장과 주먹밥까지 내어주셨습니다. 하룻밤을 그 댁에서 신세를 졌지만 아직까지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주먹밥을 먹은 뒤 남동생 시로가 “누나, 나 눈이 안 보여.” 하는 말을 했습니다. (머리는 좋지만 약삭빠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영양실조로 야맹증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주먹밥 하나로 온 가족이 배부르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원폭 투하 다음날

 이튿날인 10일은 이사하야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도중에 적기 내습을 알리는 공습경보가 울렸고 “다들 밭 가장자리에 엎드리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기에 엎드려 있으니, 누군가 적기가 쏜 기관총에 다쳤는지 들것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이사하야에 도착했지만 그 뒤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안되겠어. 집으로 다시 돌아가자.” 하고 이사하야역에서 표를 사서 로카스마치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금 마주한 집은, 2층에 있는 계단이 집 뒤편으로 튀어나온 채 부서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이웃 노인들이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도망가지 않는 편이 나았어.”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인근 사령부에서 지원 물자가 속속들이 배급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 부모님의 친가가 있는 오이타현(大分県)으로 대피하기로 하고 기차표를 사기 위해 시청에서 증명서를 받으려고 했지만, 혼란스러운 때라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냥 집에 있기로 했습니다. 로카스마치의 집을 수리해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전후에 일어난 일

 종전 후, 원자폭탄 투하 이듬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향년 53세). 동생 시로는 사무직에 종사했지만 33살에 죽었습니다. 쌍둥이 동생들은 나미노히라마치(浪の平町)에서 배를 만드는 목수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저는 이웃사람의 소개로 22살 때 필리핀에서 귀국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영어가 능숙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장의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장의사 일을 하는 사람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더니, 저와 결혼할 때는 나가사키현의 통역사로 이직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로카스마치에 있는 집에서 살았지만, 결혼하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남편은 메틸알코올을 마신 게 원인이 되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저는 참의원 의원의 자택에서 타자수로 일했습니다. 그 댁에서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 뒤 이웃분의 소개로 재혼도 했습니다. 35살 무렵 (딸아이를 데리고) 응시한 채용 시험에 합격해 학교 급식소에서 조리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정년이 될 때까지 50년을 근무했습니다.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

 무엇보다도 ‘평화’를 말하고 싶어요. 전쟁을 증오합니다. 진심으로요.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원폭으로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될 겁니다. 공학박사인 손녀딸의 사위에게 핵미사일이 날아왔을 때 미사일을 튕겨내서, 발사한 나라에서 미사일이 폭발하게끔 하는 벽 같은 건 발명하지 못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습니다.

〈2019년 9월 9일 나가사키시 시모니시야마마치의 자택에서 수록〉

작가: 아이다 고조,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와의 이별과 끔찍했던 체험

<증언자> 아카바에 마사코(赤波江 政子) 씨(94세)

 나가사키시(長崎市) 오야마마치(大山町)에 살고 있는 아카바에(결혼 전 마루오) 마사코 씨는 현재 94세로, 스무 살 때 근무처인 미쓰비시(三菱)중공 나가사키조선소 사이와이마치(幸町)공장 급여과의 사무실에서 피폭했습니다. 책상 밑으로 들어간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인 마루오 미사(丸尾 ミサ) 씨는 마쓰야마마치(松山町)의 본가에서 숨을 거뒀고, 아버지인 마루오 이세마쓰(丸尾 伊勢松) 씨는 일 관계로 오하토(大波止)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미쓰야마마치(三ツ山町)에 있는 묘지에 어머니의 유골을 매장했습니다.

 저는 1924년 11월 26일, 폭심지인 나가사키시 마쓰야마마치 118번지(현재 오카와류 가구점이 있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 전에는 ‘마루오(丸尾)’가 제 성이었습니다. 아버지인 마루오 이세마쓰는 재목상을 운영했고 어머니 미사를 포함해 가족은 3명이었습니다.
 1945년 당시 저는 스무 살이었고, 미쓰비시중공 나가사키조선소 사이와이마치공장 급여과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의 급여를 계산하는 것이 제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서무, 계산, 작업으로 부서가 나눠져 있었습니다. 저는 작업계 소속으로 근무 기록을 확인해 계산계에 넘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직원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가서 차례대로 줄을 서 있는 공원들에게 급여 봉투를 나눠주는 것도 제 일이었습니다.

원폭이 투하되던 날 아침

 1945년 8월 9일 오전, 어머니께서는 이발기로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회사 일이 바쁠 테니까 어서 출근하렴.” 하고 말씀하셨고, 저는 10시 무렵 집을 나섰습니다.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항상 전차로 출근을 했는데, 그날은 어쩐 이유에선지 구로카와 씨(앞 집에 살던 회사 동료)와 함께 사이와이마치에 있는 사무소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사무소는 목조로 된 큰 이층 건물이었습니다.

피폭하던 순간

 사이와이마치의 사무소에 도착해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상사인 니시무라(西村) 씨가 2층에서 내려와 회의를 하자고 하신 바로 그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원폭이 떨어졌습니다. 빛이나 뜨거운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와장창하는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저는 쓰러지면서 운 좋게도 책상 밑으로 굴러 들어갔습니다. 구로카와 씨도 책상 밑에 있었습니다. 니시무라 씨도 넘어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몸에 유리 파편이 박혔습니다. 구로카와 씨도 등에 유리가 박히는 부상을 입었는데, 한 번에 제거할 수가 없어서 그 뒤로 몇 년에 걸쳐 유리를 뽑아냈습니다. 저는 다행히 아무 곳도 다치지 않았지만, 머리를 부딪혔는지 얼마간은 상대방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 등 건망증과 비슷한 증상이 계속됐습니다.
 책상 아래에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님, 저를 살려주세요. 제가 왜 죽어야만 하나요? 제가 죽으면 어머니께서 슬퍼하실 거예요.” 하고 무의식중에 속삭였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무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서무 계장님도 건물 잔해에 깔려서 팔을 잘라내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톱으로 팔을 자르고 밖으로 나왔지만 과다 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친절하신 분이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건물 밖으로 피난하다

 책상 아래에서 어떡하면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갑시다! 불이 붙었어요!” 하고 남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니시무라 씨가 “지금부터 밖으로 나갈 테니까 내 다리를 붙잡아. 꼭 잡고 놓지 마.” 하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니시무라 씨의 다리에 매달렸고, 입고 있던 몸뻬 바지가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기어서 빠져나오느라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시뻘겋게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뒤 사무소 앞에 있던 쇼토쿠지(聖徳寺)의 방공호로 구로카와 씨, 니시무라 씨와 함께 잠시 동안 들어가 있었습니다. 방공호는 스무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그곳에는 몸집이 큰 외국인 포로들도 있었습니다.
 니시무라 씨는 그 뒤 다른 종업원들의 구조에 나섰습니다. 방공호로 공장 직원들이 들락거렸습니다.
 10분 정도가 지나서 저는 소변을 보기 위해 방공호에서 나와 다리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미쓰비시병원 등 주변 건물들은 납작하게 부서져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구조에 나선 남자들은 와이셔츠를 찢어서 입을 가렸습니다. 저희 사무소 건물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이봐, 저기 붙 붙은 곳까지 한번 뛰어가 봐. 그렇게 하면 불을 꺼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고 제게 말을 걸어왔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온몸이 숯덩이가 돼 버릴 게 분명했기에 “싫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신경이 곤두선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다시 방공호로 돌아왔습니다.
 얼마간 방공호 안에 있었는데 빵빵빵빵 하고 소총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찰기가 저공으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몇 번을 선회하면서 방공호를 향해 총을 쐈습니다. 증오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었습니다.
 그 당시 거리의 모습은 마치 생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방공호 앞으로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죽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이나사산(稲佐山)에서 군인들이 내려와 여러 처리 작업을 했습니다.

보국대 여학생들의 머리카락이 빠지다

 잠시 뒤 나가사키역 쪽에서 3, 4명의 보국대 소속 여학생들이 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는 “물을 좀 마시게 해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걸 마셔요.” 하고 흘러나오는 샘물을 권하면서 문득 학생들을 쳐다봤는데, 머리카락이 전부 빠져서 대머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것 외에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어머나, 머리카락이 전부 빠졌네요.” 하고 말하니 그 학생들이 “세상에, 정말이네.”라고 하더군요. 정말 가여웠습니다.

스와신사의 방공호로

  저는 도시락을 (사무소에 두고 오는 바람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구로카와 씨의 도시락을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잠시 뒤 아는 사람 중 한 명이 “이곳은 위험하니까 스와신사(諏訪神社)에 가는 게 좋겠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구로카와 씨와 함께 스와신사로 향했습니다. 신사의 돌담 아래에 작은 방공호가 있었는데, 그곳까지는 불이 번져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날 밤은 방공호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튿날인 10일에 일어난 일

 8월 10일, 저는 해가 뜰 무렵부터 마쓰야마마치에 있는 집이 걱정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래서 구로카와 씨와 함께 우라카미(浦上)까지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불이 붙은 곳을 피해서 걸었습니다. 점심때가 됐을 무렵,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한 지인과 만났습니다. “어머, 마루오 씨. 그쪽도 당한 거예요?” 하고 물어오기에 “그렇게 됐네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서둘러 마쓰야마에 있는 집까지 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유골을 앞에 두고 통곡했습니다. 구로카와 씨도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구로카와 씨의 어머니는 재봉틀 아래에서 마찬가지로 백골이 된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요코하마(横浜)에서 소개해 미쓰야마마치에 살고 있던 숙모 일가 셋은 저희 집 현관 근처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창피한 것도 잊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전날 오하토에 있는 아오키(青木)재목상에 볼일을 보러 가셨기 때문에 화를 면했습니다.
 저희 집 부엌에는 큰 철제 목욕통이 있어서 물을 가득 채워놓곤 했습니다. 시멘트와 벽돌로 단단히 고정시킨 목욕통이 거꾸로 뒤집어져서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그 근방이 폭심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목상을 하고 있던 저희 집은 배급소여서 목재를 많이 쌓아두었는데, 그 때문에 원폭이 떨어진 뒤부터 내리 며칠간 화재가 계속됐습니다.
 우라카미 천주당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집도 불타버린 데다 어머니도 백골이 되셨고……. 근처에서는 새까맣게 탄 시신을 모아 순서대로 착착 화장시켰습니다.
 그 후로는 미쓰야마마치에 있는 외삼촌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아버지도 나중에 미쓰야마마치로 오셨습니다.
 10일 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다마카와(玉川) 씨라고 하는 남자분이 자전거를 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제가 말했습니다. 자고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다마카와 씨도 삼촌댁에서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아침 5시 무렵 다마카와 씨는 자전거로 산길을 내려가셨는데, 그때 “조심해서 돌아와요.” 하고 제게 말해주셨습니다. 다마카와 씨는 집에 돌아간 뒤 곧바로 쓰러져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유골을 상자에 넣어 마쓰야마마치에서 미쓰야마마치까지 옮겼습니다. 그리고 미쓰야마마치의 안쪽에 위치한 묘지에 땅을 파서 유골을 묻었습니다. 생전에 어머니는 엄한 분이었습니다. 미쓰야마마치 출신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셨습니다.

종전 후에 일어난 일

 원폭이 떨어지고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미국 진주군이 상륙했고, 오카마치(岡町)로 미군을 실은 트럭이 몇 대나 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마쓰야마마치에서 받은 배급품을 꾸러미에 담아서 걷고 있던 저와 구로카와 씨를 향해, 미군들이 뭐라 소리를 지르며 놀려댔는데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도랑에 숨으려고 머리를 집어넣었는데 도랑 안은 기왓 조각으로 가득해서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몸을 숨길 곳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종전 후 근무했던 사이와이마치공장 사무소가 폐쇄돼 접수처가 설치됐다는 것을 알게 된 저는 짚신을 신고 미쓰야마마치부터 걸어서 향했습니다. “퇴직금은 나오나요?” 하고 물어보았지만 담당 남직원 2명으로부터는 지급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니시무라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찾아뵐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온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피폭 당일 니시무라 씨는 여러 종업원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전후에는 미쓰야마마치의 삼촌댁에서 아버지와 2년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재목상을 그만두셨습니다. 그 시절은 먹을 게 없어서 감자로 연명했습니다. 마쓰야마마치에 식량 배급을 받으러 다녔는데, 흰 강낭콩이나 고등어 통조림 등을 받아서 미쓰야마마치까지 걸어서 돌아와 다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피폭하고 2년이 흐른 뒤 마쓰야마마치에 새로 집을 지었습니다.

전후 발병한 원폭증으로 겪은 고난

 전후 저는 결혼해서 고쿠라(후쿠오카)에 살았습니다. 한동안은 비쩍 말라서 간도 좋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원폭증이라고 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백화점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서 한 번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층계참에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제가 원폭증이라는 걸 알게 된 남편은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 당신이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습니다. 병원 의사 선생님께도 지금 몸 상태로는 더 이상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쿠라에서는 피폭자 건강 수첩을 보여주면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아카바에 씨, 피폭한 사람을 아내로 맞아서 어떡해요. 아이도 넷이나 있는데 잘못되면 어쩌려고.” 하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대로 주저앉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네 명의 자식들을 끝까지 키워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약했지만 정신은 강인했습니다.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고쿠라에 살았을 적에는 매년 8월 9일이 되면 원폭 기념일(원폭의 날)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뉴스를 보거나 듣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평화롭지만 당시는 끔찍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같은 사무소에 다니는 아라키(荒木) 씨라고 하는 남자분이 제가 머물렀던 방공호로 피난을 와 있었는데, 외국인 포로에게 담배를 건네기도 하면서 잘 대해 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종전 후 그 포로였던 사람이 “아라키 씨, 아라키 씨.” 하고 이름을 부르며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라키 씨가 베푼 친절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지요. 평화롭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저희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으로 부모님도 신자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피폭 의사 나가이 다카시(永井 隆) 박사님과도 교류가 있었습니다. 자주 색종이에 그림을 그려주시곤 했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셨습니다.

〈2020년 9월 30일 나가사키시 오야마마치의 자택에서 수록〉

젠자국민학교 부근 상공에서 바라본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사이와이마치 공장 방면
촬영: 미군, 소장: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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